“나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서영란의 퍼포먼스 오세형

“나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서영란의 퍼포먼스

오세형

젊은 무용가인 서영란은 최근 들어 호기심가는 소재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왔다. 금년 내내 과거 마포일대에서 마을굿이 열리던 도당과 굿당을 리서치하고 인터뷰하여 “나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라는 퍼포먼스를 공개했다.(12. 16 오후 5시, 백남준 아트센터) 마을굿은 공동체가 주요한 농번기에 지내던 제천의식과 집단신앙으로 소소한 신화와 전설을 생산하는 촉매제였다. 새마을운동을 거치면서 대부분 소멸되어 제사를 올리던 도당 정도가 형태만 보존되는 정도로 남아있었다. 이 퍼포먼스가 내게 호기심을 일으키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소개 글에 마을 신화와 풍습에 대한 조사 내용과 과정을 몸짓으로 안무하여 풀어보겠다고 밝히고 있었는데, 탐문성격의 사실조사라는 관점과 무용의 추상적 이미지의 결합은 서로 너무 간극이 커서 오히려 이율배반적으로 보였다. ‘잃어버린 과거정신을 재현하고자’ 운운하는 안전장치격의 어휘가 등장하지 않아 은근히 궁금해지기도 했다. 보통 이런 경우 결과는 모 아니면 도였지만 가끔은 놓쳐서는 안 되는 놀라운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지 않는가.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소박하게 진행된 공연은 두 줄기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나는 무용가로서 ‘형상언어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구체화하는 줄기이고 다른 하나는 근대화과정에서 소거되고 은폐된 마을신앙의 자취를 쫒는 아마추어 민족지학자의 현장 활동기 였다. 그녀는 주관적 동기와 객관적 사료라는 상이한 두 범주의 실타래를 만들기 위해 개인 경험에서 실마리를 풀어간다. 별다른 특이점이 없는 자기 집안의 제사 관습을 설명하고는 제사 후 지방을 태운다. 그리고는 귀신이 먹은 음식을 집밖의 동물들에게 고시레 하는 장면을 퍼포먼스로 수행한다. 전체적인 퍼포먼스의 뉘앙스는 묘사도 아니고 은유도 아닌 심상치 않은 동작으로 채워져 기이한 신체성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캄캄한 무대를 정처 없이 움직이다가 후레쉬를 턱밑에서 비추며 신음소리를 내며 다소 음험하지만 익살스럽게 객석을 도발하는 식이다.

그녀가 마을신앙과 굿당과 같은 것을 조사하게 된 계기는 요한복음의 한 구절 때문이란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라는 구절을 읽고 성경을 덮고는, 말씀이 어떻게 사람이 되느냐며 오히려 관객에게 되묻는다. 그리고는 주희철학에서 태극이 만물을 생기시키는 원리를 예로 들며 ‘어떻게 철학적인 원리가 형체가 있는 물질을 만들죠?’라며 천진하게 되묻는다. 언어와 존재의 관계 또는 간극에 초점을 맞춘 관념적 질문은 이제 연금술과 김정희의 추사체에 담긴 형태의미론을 짚어나간다. 그러더니 급기야 음식물을 버리라는 말을 하지 못해 다른 사람을 시켜 대신 버리게 하는 어느 가정부의 터부까지 들먹인다.

서영란의 질문은 훈련되지 않은 어법과 조율되지 않은 발성으로 풋내 나게 제시되는데 묘하게도 이 지점에서 관객의 호기심은 작동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이야기를 마치고 잠시 벌이는 퍼포먼스는 동작도 분명하지 않고 퇴행적인데다가 웅얼거리는 대사들로 뒤범벅되어 있다. 그러나 객석은 마치 어린아이의 천진한 질문이 불현 듯 어른의 화두가 되버리듯이 눈을 점점 떼지 못한다. 관객의 기대감은 밀도 높고 긴장어린 것이라기 보다는 과연 이 허무맹랑한 질문과 그 질문을 감당 못할 것 같은 외연이 앞으로 벌일 사고(?)를 기대하는 쪽이었다. 서영란은 이렇게 퍼포먼스의 자장을 주조해냈다.

무용을 움직이는 신체의 지속으로 보는 현대무용의 지배력의 시선에서는 서영란의 동작은 대부분 정합적이지 않게 체감된다. 즉 확정된 기호나 언어로 향하지 못한 채 훈육된 신체와 언어습관에서 빗겨나 있다 라는 부정성이나 결여의 형태로만 감각된다. 그러나 그녀의 신체는 역설적으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데 바로 그 결여성을 극적으로 전환시킬 잠재적 에너지가 기대되기 때문이었다. 무용적 신체의 지속이라는 면는 탈구되었지만 무의식 속에서 형상언어가 불현듯 귀환할 것이라는 경고가 반복된다. 이는 강렬한 조형성의 도래를 염원하며 기다리는 제의적 신체가 벌이는 종속적인 맹신성 같은 것이 아닐까.

이어지는 장면들은 탈마법화한 근대세계에서 조롱받고 은폐하게 된 마을의 굿당을 촬영하고 관련자를 인터뷰한 영상과 녹음자료였다. 비교적 자세한 마을굿의 기억을 떠올려준 고모의 인터뷰와 귀신에 씌워 몇 년을 고생했던 노인의 이야기 등이다. 물론 민족지학자로 파견된 서영란의 조사태도에도 어딘가 어리숙한 무지의 태도가 깔려있었다. 이야기꾼의 고난에 천진한 맞장구도 치고 어리숙한 질문으로 실소도 자아내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미끄러짐은 역설적인 전개를 기대하는 역동성도 생겨나게 했다. 마치 우리시대의 주도적인 문화적 시선이 한계지우고 봉쇄시켜버린 과거의 유물을 파헤치고 창조적으로 개입하려는 돈키호테식의 영웅서사처럼.

그러나 영상과 인터뷰가 진행되면서 앞부분의 다이내믹에 비해 후반부에는 어딘가 모르게 질문의 힘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구술의 목적과 조사의 방향이 사실과 정확성에 근거하면 할수록 객석은 열어젖혀진 관심의 지속성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관념성은 기대감 속에 피어나는데 사실성의 꽃은 조화로 여겨지는 역설적 무대상황이고 공을 들인 인터뷰들은 다소 죽은 자료와 텅빈 발화들로 체감된다. 귀신에 씌여 수년을 고생하면서도 결국 박수무당이 되지 않은 노인의 개인서사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일이지만 그의 실감나는 삶은 역으로 처음에 제기한 추상적인 질문의 힘을 증발시키기 시작한다. 초반에 제시한 유쾌하면서도 해체적인 기질이 사라지고 지역민의 사연과 서사성에 엄숙히 매몰되는 점이 극의 긴장도를 떨어뜨린다.

사실 말과 존재, 형상과 존재의 관계를 묻는 형이상학적, 예술가적 자아와 근대성을 묻는 민족지학자라는 자아는 현대의 모순성을 대표한다. 근대성이 인식의 분류지향성과 규범성의 발현이라면 무용과 굿은 모두 강렬함의 언어가 지배적인 존재론이다. 눈앞에 보여지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기대하고 인정하려 하고 사태들을 초과하는 강렬함을 요청하는 의식이 무용과 굿의 형상적 언어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듯이 인간이라는 현존재는 염려를 통해서 공허로부터 세계를 불러내며, 예술은 염려가 만들어낸 빛을 외부로 표현하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관객이 호기심을 느끼게 된 이유는 그녀가 전문적 방법론은 훈련받은 민속학자나 인류학자가 아닌 사적인 호기심을 지닌 춤추는 여자라는 점이었다. 즉 그녀는 관념론적 질문의 다발을 통해 염려라는 현존재의 빛이 드러나는 구조를 밝혀놓은 것이다. 두 종류의 자아는 손을 맞잡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어울리기 힘든 꺼리들이었다. 두 존재론 간의 조화나 화합은 애초에 기대하기 힘든 것이었고 풀 수 없는 고로디오스의 매듭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논리와 개연성의 유혹을 넘어서 단숨에 매듭을 절단해버리는 강도 높은 신체성의 폭발을 은근히 기대했던 것이다.

기대했던 헤르메스적 상상력이 충분히 현현되지는 않았지만 의외의 성과가 있었는데 예술가와 관객의 비대칭적 관계를 허무는 예술가의 무지한 지위를 통해서였다. 어딘가 어눌한 공연수행자의 언변과 분열된 신체성은 관객의 신뢰를 저버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게 하는 요소였다. 그녀가 채집한 인터뷰나 대본들은 엉뚱한 질문과 순진한 맞장구로 채워져 있고 눈만 부릅떠도 자지러지게 웃는 아이들이 던지는 의문들 같다. 어린아이 다움 이란 가장 사소한 사물에서 한 세계 전체를 얻어낼 수 있다고 믿는 것 아닌가. 막대한 학자적 과제를 떠맡은 무지한 예술가라는 극적 정체성은 반복적으로 제시되며 마치 전문가를 흉내내는 것 같은 면이 있다. 이 때 관객은 오히려 자발적인 지적 호기심과 능동적 태도를 요청받는다. 이는 공연하는 사람의 능력을 관객에게 재분배하고 극을 수용하는 관객과의 전통적인 비대칭성을 재분배한다. 이렇게 재편성된 경험의 장은 돈키호테 같은 질문의 능력과 능동적 호기심을 관객에게 전이시키며 집에 돌아와서도 이율배반적인 질문의 고리를 수행해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