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서영란의 퍼포먼스 오세형

“나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서영란의 퍼포먼스

오세형

젊은 무용가인 서영란은 최근 들어 호기심가는 소재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왔다. 금년 내내 과거 마포일대에서 마을굿이 열리던 도당과 굿당을 리서치하고 인터뷰하여 “나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라는 퍼포먼스를 공개했다.(12. 16 오후 5시, 백남준 아트센터) 마을굿은 공동체가 주요한 농번기에 지내던 제천의식과 집단신앙으로 소소한 신화와 전설을 생산하는 촉매제였다. 새마을운동을 거치면서 대부분 소멸되어 제사를 올리던 도당 정도가 형태만 보존되는 정도로 남아있었다. 이 퍼포먼스가 내게 호기심을 일으키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소개 글에 마을 신화와 풍습에 대한 조사 내용과 과정을 몸짓으로 안무하여 풀어보겠다고 밝히고 있었는데, 탐문성격의 사실조사라는 관점과 무용의 추상적 이미지의 결합은 서로 너무 간극이 커서 오히려 이율배반적으로 보였다. ‘잃어버린 과거정신을 재현하고자’ 운운하는 안전장치격의 어휘가 등장하지 않아 은근히 궁금해지기도 했다. 보통 이런 경우 결과는 모 아니면 도였지만 가끔은 놓쳐서는 안 되는 놀라운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지 않는가.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소박하게 진행된 공연은 두 줄기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나는 무용가로서 ‘형상언어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구체화하는 줄기이고 다른 하나는 근대화과정에서 소거되고 은폐된 마을신앙의 자취를 쫒는 아마추어 민족지학자의 현장 활동기 였다. 그녀는 주관적 동기와 객관적 사료라는 상이한 두 범주의 실타래를 만들기 위해 개인 경험에서 실마리를 풀어간다. 별다른 특이점이 없는 자기 집안의 제사 관습을 설명하고는 제사 후 지방을 태운다. 그리고는 귀신이 먹은 음식을 집밖의 동물들에게 고시레 하는 장면을 퍼포먼스로 수행한다. 전체적인 퍼포먼스의 뉘앙스는 묘사도 아니고 은유도 아닌 심상치 않은 동작으로 채워져 기이한 신체성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캄캄한 무대를 정처 없이 움직이다가 후레쉬를 턱밑에서 비추며 신음소리를 내며 다소 음험하지만 익살스럽게 객석을 도발하는 식이다.

그녀가 마을신앙과 굿당과 같은 것을 조사하게 된 계기는 요한복음의 한 구절 때문이란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라는 구절을 읽고 성경을 덮고는, 말씀이 어떻게 사람이 되느냐며 오히려 관객에게 되묻는다. 그리고는 주희철학에서 태극이 만물을 생기시키는 원리를 예로 들며 ‘어떻게 철학적인 원리가 형체가 있는 물질을 만들죠?’라며 천진하게 되묻는다. 언어와 존재의 관계 또는 간극에 초점을 맞춘 관념적 질문은 이제 연금술과 김정희의 추사체에 담긴 형태의미론을 짚어나간다. 그러더니 급기야 음식물을 버리라는 말을 하지 못해 다른 사람을 시켜 대신 버리게 하는 어느 가정부의 터부까지 들먹인다.

서영란의 질문은 훈련되지 않은 어법과 조율되지 않은 발성으로 풋내 나게 제시되는데 묘하게도 이 지점에서 관객의 호기심은 작동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이야기를 마치고 잠시 벌이는 퍼포먼스는 동작도 분명하지 않고 퇴행적인데다가 웅얼거리는 대사들로 뒤범벅되어 있다. 그러나 객석은 마치 어린아이의 천진한 질문이 불현 듯 어른의 화두가 되버리듯이 눈을 점점 떼지 못한다. 관객의 기대감은 밀도 높고 긴장어린 것이라기 보다는 과연 이 허무맹랑한 질문과 그 질문을 감당 못할 것 같은 외연이 앞으로 벌일 사고(?)를 기대하는 쪽이었다. 서영란은 이렇게 퍼포먼스의 자장을 주조해냈다.

무용을 움직이는 신체의 지속으로 보는 현대무용의 지배력의 시선에서는 서영란의 동작은 대부분 정합적이지 않게 체감된다. 즉 확정된 기호나 언어로 향하지 못한 채 훈육된 신체와 언어습관에서 빗겨나 있다 라는 부정성이나 결여의 형태로만 감각된다. 그러나 그녀의 신체는 역설적으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데 바로 그 결여성을 극적으로 전환시킬 잠재적 에너지가 기대되기 때문이었다. 무용적 신체의 지속이라는 면는 탈구되었지만 무의식 속에서 형상언어가 불현듯 귀환할 것이라는 경고가 반복된다. 이는 강렬한 조형성의 도래를 염원하며 기다리는 제의적 신체가 벌이는 종속적인 맹신성 같은 것이 아닐까.

이어지는 장면들은 탈마법화한 근대세계에서 조롱받고 은폐하게 된 마을의 굿당을 촬영하고 관련자를 인터뷰한 영상과 녹음자료였다. 비교적 자세한 마을굿의 기억을 떠올려준 고모의 인터뷰와 귀신에 씌워 몇 년을 고생했던 노인의 이야기 등이다. 물론 민족지학자로 파견된 서영란의 조사태도에도 어딘가 어리숙한 무지의 태도가 깔려있었다. 이야기꾼의 고난에 천진한 맞장구도 치고 어리숙한 질문으로 실소도 자아내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미끄러짐은 역설적인 전개를 기대하는 역동성도 생겨나게 했다. 마치 우리시대의 주도적인 문화적 시선이 한계지우고 봉쇄시켜버린 과거의 유물을 파헤치고 창조적으로 개입하려는 돈키호테식의 영웅서사처럼.

그러나 영상과 인터뷰가 진행되면서 앞부분의 다이내믹에 비해 후반부에는 어딘가 모르게 질문의 힘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구술의 목적과 조사의 방향이 사실과 정확성에 근거하면 할수록 객석은 열어젖혀진 관심의 지속성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관념성은 기대감 속에 피어나는데 사실성의 꽃은 조화로 여겨지는 역설적 무대상황이고 공을 들인 인터뷰들은 다소 죽은 자료와 텅빈 발화들로 체감된다. 귀신에 씌여 수년을 고생하면서도 결국 박수무당이 되지 않은 노인의 개인서사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일이지만 그의 실감나는 삶은 역으로 처음에 제기한 추상적인 질문의 힘을 증발시키기 시작한다. 초반에 제시한 유쾌하면서도 해체적인 기질이 사라지고 지역민의 사연과 서사성에 엄숙히 매몰되는 점이 극의 긴장도를 떨어뜨린다.

사실 말과 존재, 형상과 존재의 관계를 묻는 형이상학적, 예술가적 자아와 근대성을 묻는 민족지학자라는 자아는 현대의 모순성을 대표한다. 근대성이 인식의 분류지향성과 규범성의 발현이라면 무용과 굿은 모두 강렬함의 언어가 지배적인 존재론이다. 눈앞에 보여지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기대하고 인정하려 하고 사태들을 초과하는 강렬함을 요청하는 의식이 무용과 굿의 형상적 언어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듯이 인간이라는 현존재는 염려를 통해서 공허로부터 세계를 불러내며, 예술은 염려가 만들어낸 빛을 외부로 표현하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관객이 호기심을 느끼게 된 이유는 그녀가 전문적 방법론은 훈련받은 민속학자나 인류학자가 아닌 사적인 호기심을 지닌 춤추는 여자라는 점이었다. 즉 그녀는 관념론적 질문의 다발을 통해 염려라는 현존재의 빛이 드러나는 구조를 밝혀놓은 것이다. 두 종류의 자아는 손을 맞잡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어울리기 힘든 꺼리들이었다. 두 존재론 간의 조화나 화합은 애초에 기대하기 힘든 것이었고 풀 수 없는 고로디오스의 매듭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논리와 개연성의 유혹을 넘어서 단숨에 매듭을 절단해버리는 강도 높은 신체성의 폭발을 은근히 기대했던 것이다.

기대했던 헤르메스적 상상력이 충분히 현현되지는 않았지만 의외의 성과가 있었는데 예술가와 관객의 비대칭적 관계를 허무는 예술가의 무지한 지위를 통해서였다. 어딘가 어눌한 공연수행자의 언변과 분열된 신체성은 관객의 신뢰를 저버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게 하는 요소였다. 그녀가 채집한 인터뷰나 대본들은 엉뚱한 질문과 순진한 맞장구로 채워져 있고 눈만 부릅떠도 자지러지게 웃는 아이들이 던지는 의문들 같다. 어린아이 다움 이란 가장 사소한 사물에서 한 세계 전체를 얻어낼 수 있다고 믿는 것 아닌가. 막대한 학자적 과제를 떠맡은 무지한 예술가라는 극적 정체성은 반복적으로 제시되며 마치 전문가를 흉내내는 것 같은 면이 있다. 이 때 관객은 오히려 자발적인 지적 호기심과 능동적 태도를 요청받는다. 이는 공연하는 사람의 능력을 관객에게 재분배하고 극을 수용하는 관객과의 전통적인 비대칭성을 재분배한다. 이렇게 재편성된 경험의 장은 돈키호테 같은 질문의 능력과 능동적 호기심을 관객에게 전이시키며 집에 돌아와서도 이율배반적인 질문의 고리를 수행해가는 것이다.

The God of Earth comes up Imperfectly research 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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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래예술공장 맵 선정 예술가 서영란 지신은 불완전하게 올라온다.



소개 1. 이 작업은 무용사 혹은 예술사 책의 머리에 자리잡고 있을 내용들을 답으로 하는 당연한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소리와 춤이 무대 위로 올라오기 이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

근대화되던 시기의 모습 알거나 기억을 가지고 계신 분들을 만나 인터뷰하였다. 극장 무대가 생기기 시작하던 시절에 춤과 소리를 하시던 분들은 대부분 무당이거나 기생이셨다. 그들로부터 들었던 춤과 소리의 형식은 아주 어이가 없을 만큼 야생적인 자연스러움이었다. 정해진 틀이 없고 즉흥적으로 변할 수 있었던 춤과 소리는 관객과의 유동적인 호흡의 교환, 교감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 즉흥성, 벌렁벌렁 춤추고, 말하는 것처럼 소리를 할 수 있게 되기까지에는 흔희 미신처럼 여기는 ‘신을 받는 것’과 절대적으로 관계되어 있었다.

리서치를 통해 알게된 춤과 소리의 형식들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타문화권의 민속 춤, 소리와도 닮은 부분들이 있었는데. 이 또한 결국 관객과의 교감을 결과로 낳는 즉흥이 시작되는 순간 혹은 이전, 신으로 부터 받아온 것이었다. 춤과 소리의 옛 형태에는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는 고차원적인 혹은 또 다른 정신의 상태로 우리를 인도하는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추적이 어떤 야생적인 개연성을 띠고 무대위의 이미지들을 펼쳐진다. 할머니의 소리는 어느 새 남대문 시장의 아저씨의 옷파는 소리에, 혹은 트로트의 꺽는 소리에 감탄하는 우리의 신경망속에 느닷없이 내재되어 있으므로.


○ 크레딧

안무 : 서영란  /  소리 : 노은실,

리서치 : 서영란, 노은실

인터뷰 참여해 주신 분 : 영광 공옥진 선생님 제자 한현선님,

순천 삼설양굿 무형 문화재 박경자 무인님,

진주의 경상대 국어교육과 명예교수 김수업 교수님,

동해안 별신굿 김용언 무인님.

특별 소리 출연 : 교보생명 관리사 김지현님.

리서치에 도움주신 분 : 남원교방 민살풀이 조갑례 선생님,

순천의 고수, 순천 국악원의 정동준 선생님,

순천대 김용찬 교수님, 순천 선암사,

진주 무형문화재 보존회, 제주도 영등굿 김윤수 무인님.

멘토 : 이미경, 문경수, 서정록.

제작 후원 : 서울문화재단 문래예술공장 맵 지원사업.

리서치 후원 : 예술공간 돈키호테의 기억과 증명 레지던시, 몽골 노마딕 레지던스.



○ 리서치 과정

삼설양굿의 박경자 선생님은춤은 벌렁벌렁 추는 것이랑께라고 하셨다. 어른들은 춤을 배워서 ? 의아해하는 말씀을 하셨었다. 문화재로 지정된 살풀이 이전에는 지방마다 다른 살풀이가 있었고 그것은 즉흥적으로 추어지는 춤이었으며 무녀들의 춤에서 영향을 받았다. 궁중에서 이뤄진 춤을 제외하고는 우리나라의 춤은 즉흥춤이었다. 공옥진 선생님께서는 매번 다른 살풀이를 추셨다 한다. 비가 오면 다르고 장소가 다르면 달라지는 . 즉흥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형태를 수가 없고 역사의 유물로 남을 없다. 굿거리에 한스러운 살풀이를 추다가도 자진모리에는 신명나게 곱사등이로 변신할 있었던 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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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밀양 탈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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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삼설양굿 박경자 무인 인터뷰 및 순천향교 공연 모습>

순천 우리나라 민속 특히 탈춤에는 바보이매, 문둥이 불구자들이 종종 등장한다 진주오광대를 복원하신 김수업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병신춤은 지신의 춤이다. 병신은 소외받은 타자가 되기 이전에 지신이었다. 처용은 불구였고 그는 지신이었다. 승무는 깨달음을 얻은 직후 신이나서 승려가 춤을 후대 사람들이 따라서 추다가 만든 춤이라는 이야기를 봉정자 주지스님께 들은 적이 있었다.

몽골의 전통춤 승려가 무서운 스피릿을 내려 받아서 춤이라는 이야기와 연결되었다. 더군다나 몽골에서 특별한 행사의 경우 불구자가 공연을 한다고 한다. 근대 무대 이전의 풍경을 알고 있는 마지막 기생, 예인들로부터 들은 귀동냥은 어째 점점 하나의 지점을 향해 돌아서돌아 가고 있었다. 리서치 노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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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좌:몽골의 무용수 온드라가 그린 스피릿이 내려오는 모습  / 사진 우: 몽골 참 >

임금(헌강왕)이 개운포에 납셨다가 돌아오면서 낮에 바닷가에 쉬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서 길을 잃게 되었다. 놀라서 신하들에게 물었더니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는 동해의 미리가 하는 짓이라 좋은 일을 해주시면 풀릴 것입니다.’ 했다. 이에 유사에게 일러서 가까운 곳에 미리를 위한 절을 짓게 하고 임금이 영을 내리니까 구름과 안개가 걷혀서 그곳 이름을 개운포라 하게 되었다. 동해 미리가 기뻐서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임금 앞에 나타나 은덕을 찬양하며 춤을 바치고 악(樂)을 베풀었다.  –삼국유사

그 아들 하나가 임금을 따라 서울에 와서 정사를 도왔는데 이름이 처용이다. 임금이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삼게 하고 머물러 있게 하려고 급간(級干) 벼슬까지 주었다. 그 아내가 매우 아름다워서 역신(疫神)이 흠모하다가 사람 모습을 하고 밤에 그집에 들어와서 몰래 함께 잤다. 처용이 바깥에 있다가 집에 와서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나왔다. 이때 역신이 제모습을 드러내고 처용 앞에 꿇어서 말하기를 ‘내가 그대의 아내를 탐내다가 이제 침범했는데 그대가 성을 내지 않으니 감동하여 우러르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그대의 모습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그 지개에 들어가지 않기로 약속합니다.’ 했다. –삼국유사

신으로부터 나온 악령이 사울에 임했을 떄, 다윗이 하프를 가지고 그것을 손으로 타자, 사울은 정신이 가라앉고 좋아져서, 악령은 그를 떠났다. –구약성서 사무엘기 상 16장 23절

인도의 시바신은 우주의 소리로부터 음악과 춤을 창조하였다.

특수한 종류의 음악이나 악기, 혹은 하나하나의 노래의 궁극적인 기원에 관해서는, 민족음악학이나 민족지의 문헌 속에 자주 기재되어 있는데, 음악의 궁극적인 기원에 관한 신념을 다룬 설명이 거의 발견될 수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바송귀족 사이에서는, 세대의 차이와, 그 세대 나름의 신념에 상당히 명백하게 결부된, 몇몇 다른 견해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모두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아버지들이나, 또 그 아버지들이 음악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궁극적인 기원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연장자들은 조금 더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음악은 에파르 무쿠루, 신으로부터 왔다고 말합니다. 그런대로, 신으로부터 온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문화영매인 무로페의 힘을 빌어서 간접적으로 온 것인가에 관해서는 이설이 있습니다.  –민족음악학

나이지리아 이부조족의 영매 오르가디에는 숲의 영들이 연주하는 음악과 춤을 몰래 지켜본 후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었다. 이렇게 하여 이조부족에서 춤과 노래가 생겨났다.   1960나이제리아 아사바족 사람들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음악은 처음에, 이부조족의 한 사람이 오르가디에라는 이름의 사냥꾼이 크직한 사냥감을 찾는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에 가져온 것입니다. 그가 숲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놀랍게도 음악이 들려왔던 것입니다. 그가 숨어있자 숲의 정령의 일당이 음악을 연주하면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는 용케 숨어있는 장소에서 관찰, 춤사위며 불려지는 노래의 곡조를 충분히 외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부락으로 되돌아와서 이 음악을 나라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새로운 춤이나 노래는 모두, 정글에서 사냥감을 찾고 있던 사이에, 사냥꾼들이 최초로 들은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본래는 숲의 정령들의 것이었다고 합니다.

플래트헤드 인디언은 온갖 음악의 궁극적인 기원을 적어도 옛 시대에는 환상체험으로 돌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장르로서의 음악에 관해서라기보다도, 하나 하나의 노래에 관한 사항입니다. 화이트는 뉴멕시코의 시아의 프에블로족에 관해서, ‘저마다 창조의 대상이 되는 노래나 의식은 그것들이 만들어질 때 마련된 것이다’라고 보고해서 초자연적인 기원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특수한 종류의 음악이나 악기의 기원에 관해서는 좀더 증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시에라 레오네에서의 목금과 목금의 표준 가락의 기원이, 새의 노래에서 왔다는 존의 설명은 이미 인용한 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샨티족도 북치기의 기원을 어떤 특별한 새에 돌리고 있습니다. 그 새의 우는 소리의 북의 가락과 엇비슷합니다. 고수는 누구나 이 새를 토템으로 삼고 있으며, 이것과의 동족관계를 주장해서, 먹거나 죽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울음소리는 무슨 쿠로 쿠로 쿠로 쿠로 코 키니 키니 키니 쿠로 키니 카카 키니 키니 키니 카 하는 것 같으며, 아샨티인은 이것이 북을 치는 것을 일러준다고 말합니다.

작업노트 리서치를 통해 알게 된 춤과 소리의 형식들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타문화권의 민속 춤, 소리와도 닮은 부분이 있었는데, 이 또한 결국 관객과의 교감을 결과로 낳는 즉흥이 시작되는 순간, 혹은 이전 신으로부터 받아온 것이었다. 춤과 소리의 옛 형태는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는 고차원적인 혹은 또 다른 정신의 상태로 우리를 인도하는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A. 네허에 따르면 북이 초당 3회 4회 6회 8회의 속도로 반복적으로 울릴 때, 몰아가기 반응이 나타난다. 북소리는 초당 3회에서 7회 사이일 때 가장 효과적인 반응을 보이며, 뇌파는 4hz에서 7hz사이의 세타파가 중심을 이루게 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듣거나 내는 소리는 우리의 심장박동수, 호흡횟수 변화와 뇌파 변화를 일으키고 이를 통해 의식의 변화를 가져온다. 북소리 세타파의 몰아가기 능력은 뇌의 의식상태를 변화시켜 샤먼이 영계로 여행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플라멩고 특유의 리듬은 시계바늘처럼 12박을 최소단위로 하여 이를 콤파스라고 부른다. 12박에 악센트를 주면 그 독특한 리듬이 태어나는 것이다. 예로 쏠레아레스는 12박 중에서 3.6.8.12박에 악센트가 있다. 최저의 약속 단위인 콤파스를 지키면서 기타와 무용, 노래와 기타, 무용과 기타로 자유롭게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곡을 구성해가는 것이다. 이때 음악가들과 무용수들은 ‘아이레 Aire 공기 혹은 리듬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를 탄다고 한다. 플라멩꼬 특유의 마성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두엔데Duende가 있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귀신 요정 또는 비단의 일종이지만 위대한 깐따오르 마누엘 또레는 ‘검은소리’라고 말했고 시인 로르까는 ‘피로 가득찬 영혼의 마지막 방’이라고 표현했다.

세계 각국의 민속음악이 가진 특징들. 문화마다 다르면서도 굉장히 보편적인 특성을 지닌다.  3박자의 장단, 점점 빨라지는 장단, 정확한 음계가 아닌 비소음계, 미분음과 같은 미세한 음정들. 떠는, 꺽는 음들. 단선율로 지속되는 패턴 안에서 말처럼 이어지는 찬트형식, 장단 안에서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즉흥 등. 이러한 특징들을 공통적으로 지닌 민속음악은 사람의 정신을 고차원적인 혹은 초자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다른 상태로 이끄는 것을 놀랍도록 잘 이용하고 있다. –리서치 노트

90년 중반 브라질의 타악기 연주자들이 녹음할 때 였다. 특정 리듬을 연주하던 그들이 갑자기 신이 들려 그 리듬과 관계된 요루바의 신들의 이름을 외쳤다. –Joachim-Ernst Berendt

그 리듬은 신이 주셨다’라고 말하는 아프리카나 남미 음악인들의 말이 뇌리에서 사라지지가 않았다. 신화적이고 신비적인 문장이다. 동시에 현재의  학습, 교육 방식에 대하여 영감을 주는 말이기도 하다. 틀이 없는 형식, 학습이 없는 학습이 그들의 말과 음악에서 발견된다. –리서치 노트

오스트랄리아의 아른헴 랜드의 유르칼라족은 갓난 아이가 말을 더듬더듬거리며 흉내내는 시도를 신비스럽고도 신성한 노랫말을 해명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으며, 이것은 노래를 발명한다라는 개념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유르칼라족에 있어서는 노래를 생각해 낸다든가 창조한다든가 하는 것은 전혀 없고, 있는 것은 오직 발견뿐입니다. 유아의 서툰 말에 입각한 신성한 노래는 다른 어떤 노래보다도 옛노래라고 생각되고 있습니다. 노래가 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오직 발견되기를 기다릴 따름입니다. 여기에 함의되어 있는 생각은 아보리진들의 시대와 혁신에 대한 일반적인 태도와 완전히 궤적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구석기 시대에 언어를 발명한 사람들은 발성할 때 입이 움직이는 방식, 그리고 활용되는 공기관의 부분들을 소리의 의미와 직접 연결했을 것이다. – 프로메테우스의 불

인디언 멸망사, 민속문화의 박제된 멸망사를 대해 논의하는 이야기들을 들어왔던 것 같다. 이번 작업에서는 또 다른 미세한 존재들의 멸망사 동시에 발견사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결정된 음계 사이의 확정되지 않은 음들, 형태가 정해지기 이전까지의 움직임과 춤들을 발견한 것은 무대 위에 올려질 수 있는 것에 대한 무한대의 가능성을 확장시켜 주었다.리서치노트


노래를 만드는 것은 근사한 일 그러나 대개는 실패로구나.

소망이 이루어지면 근사한 운명.

그러나 대개는 빗나가고 마는구나.

순록을 사냥하는 것은 근사한 일.

그러나 좀처럼 붙잡을 수 없구나.

평원을 밝히는 밝은 횃불처럼 타오르고 싶다고 생각하건만.

한편의 노래를 만드는 것은 근사하다.

그러나 때때로 실패한다.

사냥은 근사하다.

그러나 좀처럼 빛나지 않는다.

얼음 위에서 아바야.

행복하게 타는 등잔의 심지처럼은.

희망은 근사하다.

그러나 모두 빛나가 버리고 만다.

이것이고 저것이고 이렵다.

아바야야. 아뱌야야. 왜 그럴까요.

내 노래가 될 것을 사용하고 싶건만, 내 노래가 될 것을 만들고 싶건만, 그것이 떠오르지 않으니, 어째서 그럴까요.

그것에 관한 노래가 없다. 말이 멀다. 나는 지금 노래를 얻으려 하고 있다. 그들이 내가 노래하는 것을 바라고 있으니까.

나는 어제 저녁 이 노래를 가까이 했다. 그는 춤 동료에게 노래를 불러 줄 때 말을 만들기를 좋아한다.

노래들을 만드는 것이 즐거운 사나이이니까. 모든 노래가 다 불리워져 버렸다.

그는 그 중에서 몇 갠가를 추켜들고 자기 노래를 덧붙여서 새로운 노래를 만들었다.


지신은 불완전하게 올라온다.

<진주오광대의 오문둥놀음>을 쓰신 김수업 교수님께 들은 이야기이다.

 

L’evi Strauss, <The Structural Study of Myth>, Myth : A Symposium pp.81-106

“신화학에 있어서 대지로부터 태어난 인간의 보편적 특징으로 그들이 깊은 곳에서 처음 출연하게 되는 순간에는 그들은 걷지 못하거나 또는 비틀거리며 서투르게 걷는다.

이 점은 푸에블로족의 신화에 등장하는 토속적인 존재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출현을 인도하는 존재인 마사우위와 슈마이콜리는 모두 절름발이다. 즉 피를 흘리고 있는 발,, 욱씬욱씬거리며 아픈 발을 가지고 있다. 콰키우튼족의 코스키모에게도 그가 토속의 피를 치아키슈에게 잡혀 먹히고 난 뒤에 똑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즉 그가 대지의 표면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절뚝거리며 걷거나 또는 옆으로 뒤뚱거리며 걷게 된다.”

 

지신은 우리에게 지신밣기라는 민속놀이로 남아있다. 그리고 탈춤놀이, 허수아비, 처용춤에서 지신의 남아있는 형태를 볼 수 있다. 이는 이것들이 굿놀음으로 부터 왔음을 알 수 있다.

“진주 오광대의 오문둥놀음은 땅서낭들이 질병서낭을 쫒아내는 굿놀음에서 자란 자취를 아직도 지니고 있다. 이 굿놀음의 뿌리로는 세속에 나와서 글자로 적힌 신라의 처용놀음과 굿 안에 남아서 놀음으로 내려오는 동해안의 처낭굿을 꼽을 수 있겠다. 그것을 땅서낭의 놀음인 줄 모르고 문둥이 놀음으로 알게 된 것은 아주 가까운 요즘의 일이고, 십구 세기까지만 해도 곱사놀음이나 병신놀음으로 알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옛날로 올라갈수록 곱사나 병신의 모습으로 춤추는 놀이꾼들을 땅서낭이 나타난 것으로 알고 굿판의 사람들이 신앙심을 가지고 모두 함께 어울려 즐겼을 것으로 보인다.”

지신은 땅의 신으로 하늘의 천신, 땅의 지신, 바다의 신, 산의 신이 있는데 천신을 제외하고는 모두 땅에서 올라오는 지신으로 싸잡히는 것이다.

“우리 겨레가 믿었던 서낭은 아주 여러 가지로 나타나서 다신 숭배라고들 하지만 그것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하늘서낭과 땅서낭으로 크게 갈래진다. 그리고 뫼서낭이니 물서낭이니 하는 것은 모두 땅서낭에 싸잡히는 것이다. ”